Heraus kommt heraus

* 어제 가톨릭 학생회 VITA 개강모임이었다. 식사할 때 우리 지도수녀님이시자 을지병원 원목실에 근무하시는 엘리사벳 수녀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작년에 한참 방황하느라 VITA 잘 나오지도 않고 사실은 그만둘 마음까지 먹고 있었으므로 작년에 새로 부임하신 엘리사벳 수녀님과는 거의 처음 이야기를 나눠보는 셈이었다. 그래서 수녀님에 대해 많이 궁금했다. 수녀님 어디 사세요, 했더니 목동에 있는 수녀원에 사시면서 을지병원으로 출퇴근하시는 거란다. 그러면서 수녀님들 특유의 멘트, '우리집에 놀러 와요.' 하시더니 수도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 주신다. 얼마전에 제3세계로 의료선교를 가고 싶다는 마취과 전문의가 입회했다는 말씀과 함께. -,.-

수녀님 소속 수녀회에선 네팔로 의료선교를 파견하는 모양이다. 근데 수녀님 말씀에 의하면,
"소달구지 굴러다니는 못 사는 나라에 있으면서 수녀님들이 한국 오고싶다는 말 안 하는 것 보면 신기하다. 그런데 그 수녀님들 얘기 들어보면, 그 못 사는 동네의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아이들 안아주고 약 나눠주고 하다보면 하루하루가 너무도 빨리 가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나도 그렇다. 환자방문 다니다 보면 아픈 사람들, 불쌍한 사연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나도 늘 그 사람들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운다."
아닌 게 아니라 수녀님은 미사를 드렸던 대흥동 한방병원에서 식당까지 200미터 정도를 걸으시면서 신부님이랑 끊임없이 환자들 얘기를 하셨더랬다. 누구환자 있잖아요, 너무 힘드신 것 같아서 몇 번 얘기하다가 성모병원 호스피스실로 옮겨 드렸어요. 신부님도 찾아가 보세요. 누구환자는 그 아들 때문에 걱정이 너무 많으세요. 신부님 아는 사람 있으면 중신 좀 서세요. ... 그건 사무적이거나 의무적인 태도로 하시는 말씀이 전혀 아니었다.

그 말씀 들으면서 지난 2월 피정 때 느꼈던 걸 또 느꼈다. 한의사 생활이랑 수도생활이 다르지 않다는 것.

사람들은 한의사라는 직업의 어떤 단면들만 보고 쉽게 욕도 하고 깎아도 내리지만, 내가 여기 와서 보는 수많은 선생님들은 사랑하기를 직업으로 삼은 것 같은 분들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 날 환자들 만날 생각이 우선이다. 아직 진료같은 건 먼 얘기지만, 하다못해 의료봉사 가서 약 싸고 침 뽑는 나만 해도 그렇다. 의료봉사를 몇 번 가서 마을 분들과 친해지면 그 마을 사람들은 나에게 또 다른 사랑이 된다. 직업도 아니고 매일 가는 것도 아니어서, 24시간 머리를 채울 정도까진 안 되지만, 안 간지 며칠 되면 보고 싶어서 마음이 설레곤 한다. 그래서 일주일만에 의료봉사 가는 날이 되면 '분금이 아줌마 보고싶다~!'하면서 설레서 출발하게 된다. 경험 안 해 본 사람은 그 마음 모를 거다.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유명한 어느 한의사 선생님이 강연을 부탁 드리면 듣는 사람 몇 명 이상 되는지 따져 그 이상 안 되면 거절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모르긴 모르지만 그 분도 이런 이유 때문에 그러시지 않을까 한다. 아무리 유명하고 사회활동을 많이 하시는 분이지만 그 분의 모든 활동은 결국 한의사라는 직업을 기반으로 한다. 의사가 진료를 접고 강연을 나가는 건 엄마가 갓난쟁이 아기를 놔두고 볼일 보러 가거나, 막 사랑에 불이 붙은 연인을 홀로 두고 다른 사람 만나러 가는 것과 비슷할 거다. 겨우 한 열댓 명에게 가벼운 강연 한 번 하자고 환자들을 버려두고 나가는 건 효율적인 선택이 못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열댓명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뭔가 좋은 일을 하게 될 수도 있겠으나, 사랑이 불붙은 연인을 두고 소개팅을 나가는 건 좀 이상한 선택이긴 하다.

이렇게 직업적으로 사랑하며 살기 때문에, 내가 참 존경하는 권원장님은 '한의사는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되는 직업이다' 하신다.

* 2월에 아는 수녀님 도움으로 수녀원에 들어가 피정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수녀님이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해 본 적 있냐고 물으셨다.
있지요. 물론 있지요.
수녀님이 그러셨다.
수도자가 되더라도, 그런 사랑을 해 본 사람이 낫다고. 왜냐하면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피상적으로밖에 이해 못하기 때문에.

환자를 사랑하는 문제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죽도록, 미친 것처럼 사랑해 본 적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한의사 선생님들이 대개, 얼른 결혼해라 결혼해라 하시는 이유도 상당부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음양론을 많이 다루는 영향도 무시 못할 것이다. -_-)

그러니 결국은 큰 상처와 함께 파토가 났고, 오래오래 반복적으로 아프고 벌떡증이 나고, 되돌아보면 내가 미쳤던 것만 같아 또 미치겠지만, 어쨌든 그 사랑을 해본 것은 참 잘 한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 그리고 사실은 아프더라도 이렇게 매듭이 지어졌기에 더 감사한 일이다. 이상은 노래처럼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기에 사랑할 땐 그 사랑을 바라보지 못했는데, 떨어지고 보니까 그 사랑이 더 명확하게 보인다. 게다가 미쳐있던 그 순간에도 결국엔 끝이 다른 두 개의 길을 억지로 엮고 있다는 걸 알아 늘 불안하게 뭔가를 숨겨놓고 덮어놓고 있었는데, 이젠 도저히 맞춰지지 않는 두 개의 끝을 맞추겠다고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더 정직하게 사랑할 수 있다.

* 작년엔 동아리 의료봉사를 시작하는 마을마다 마을과 우리의 사정이 맞지 않아 한 학기만에 의봉을 접게 되었는데, 이번에 가는 곳에선 모든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갑자기 불어난 동아리 식구들이 모두 잘 적응했으면 좋겠고, 마을 분들과 우리가 서로 君火처럼 꾸준히 따뜻하게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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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Olga 2007/03/17 10:02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어찌 이렇게 제가 원하는(ㅋㅋ) 글을 잘 쓰시는지요 ㅎㅎ 제 상처에 부드럽게 스며들어 치유해주는 약이 되고 있어요~ 감사 ^-^ 꼭 제주 놀러오세요.. 기침이 낫지 않고 해서 병원을 갈까 하다 한의원을 갔어요 따뜻한데 누워서 침맞고 있으니 이러 저러 명상(잡상 ;;)도 되고 좋더라구요 흘러나오는 음악이 가요가 아니고 한약 냄새가 가득했으면 운치도 있을것 같았는데 헤라우스님의 병원은 어떨까 무척 따뜻하고 아늑한 곳이 될거라고 생각했어요 제주도에 분점 내실 생각은 없으세요~? ^^

    • BlogIcon Heraus 2007/03/17 16:22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제 글을 좋아해 주시니 감사해요. ^^
      올가님이 제주도 오라고 초청을 해 주셨으니 올여름은 꼬오옥 가야겠군요. ㅋㅋ 이힛.

  2. BlogIcon 아트걸 2007/03/18 04:55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자기...전화하셨을 때 자고 있었어요. 나중엔 너무 늦어서 연락 못했었고요. 이따가 전화할게요~

    글 보고 많은 점을 느꼈는데...그건 나중에 통화하며 나누기로 하고...
    일단 얘기하고픈 건...이번학기도 동아리 활동으로 바쁜 생활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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