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aus kommt heraus

새로 생긴 '냉면전문점' 전단지가 집에 와 있었다.
1000원 할인쿠폰과 함께.
엄마랑 간만에 밖에서 냉면 좀 먹어보자고 갔는데
가게만 크고 장사하는 게 영 어설펐다.
음식도. -_-;;
음식물가가 싼 대전에서 냉면 한 그릇에 5천원이나 받으면서
뭔가 어설픈 국물에 고춧가루 다대기를 잔뜩 풀어 제 맛이 뭔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분식집 냉면처럼 면 위에 수박 한 쪽을 얹어주는 맘에 안 드는 모냥새.
어쩜 그 집은 후식 커피조차도 어설프고 맛이 없었다.

나 어릴 적 별명은 냉면귀신.
외식만 하면 '냉면 먹어요!' 해서 오빠에게 핀잔을 많이 들었다.

내가 거의 30년 토박이로 살던 대치동에
'묘향산 면옥'이라는 냉면전문점이 생긴 적 있었다.
시원한 국물맛, 메밀함량이 높아 쫄깃하고부드럽기보단 뜩뜩하고 거칠던 독특한 면발
한 조각 얹혀 나온 수육과 배 한 조각
흠흠. 잊지 못할 그 맛.
내가 초등학교 때였는데
그 집만 가면 냉면 국물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먹었다.
은마아파트 뒤 고기집 '고바우'의 냉면맛도 잊을 수 었다.

옛날엔 냉면집들이 국물을 직접 냈다.
그래서 냉면은 고기집에서 팔거나,
냉면전문점이라는 데들은 다 수육 메뉴를 갖고 있었고
냉면 위에도 수육 한 점이 꼭 얹혀 나왔다.
고기를 삶아야 육수가 나오고 육수가 나와야 국물을 만드니까.
그 시절엔 냉면에 무식하게 고춧가루 다대기 잔뜩 풀어주는 집 없었다.
국물에 자신있으니까 그랬겠지.
깊은 육수맛과 시원한 동치미맛이 섞인 국물맛을 음미하려면
고춧가루 마늘 범벅의 다대기는 절대 넣으면 안 되지.
그 시절엔 그냥 밥 파는 아무 식당 혹은 분식집이나 가서 물냉면 시키면
완전 낭패였다. 라면스프처럼 냉면 건면에 같이 나오는 가루스프 풀어서
몬 맛인지 알 수 없는 밍밍하고 비릿한 국물이 나왔으므로.
그리고 그 밍밍하고 비린 국물을 내는 집들도 물냉면에 고춧가루 막 푸는 무식한 짓은 안 했다.

언젠가부터 냉면의 맛이 '표준화'되기 시작했고,
냉면 국물에는 고춧가루와 다대기를 잔뜩 얹어주는 게 일반화되었다.
맛에 자신이 없어지고 손쉽고 맛없는 조리법이 일반화되면 강한 양념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전에 (한국식) 중국음식에 조예가 깊은 선배가
볶음밥을 제대로 볶아낼 줄 아는 집들이 적어지면서
느끼하고 볼품없는 맛을 감추기 위해 볶음밥에 짜장 얹어주는 풍조가 생겼고
단순하게 보기에 그것은 '맛있으라고 뭐를 더 얹어주는' 행위이므로
맛을 감출 필요 없어 볶음밥 자체만 주는 집들이 오히려 인심 야박한 집으로 인식되면서
한국식 중국음식점의 볶음밥은 다 짜장을 뒤집어쓰게 되었다고 하던데
물냉면에 다대기 얹어주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점'이고 고기집이고간에 직접 냉면육수를 내지 않으므로
냉면 위에 수육 한 점이 놓이는 경우도 거의 사라져갔다.
국물도 안 내면서 서비스 한 점 얹어주자고 비싼 소고기를 일삼아 삶는 집은 없으니까.

하여튼 그리하여 우리 모녀는 오늘 할인쿠폰 두 장을 쓰자고 8천원을 낭비한 꼴이 됐다.
전문점이라고 기대를 더 하고 가서 실망이 컸던 것 같다.
집앞 홈에버나 백화점 지하 푸드코트에서 삼천오백원 짜리 냉면 사먹는 게 나을 것 같다.
게다가 그 가게 서비스며 뭐며 다 어설펐다구.
가게는 무지 넓고, 메뉴는 물냉 비냉 수육 만두 네 가지 뿐인데
잘 버텨나갈지 걱정해주고 싶을 지경.
이제는 제대로 된 냉면을 먹으려면 호텔한식집이라도 가야 하는 걸까?

비닐팩에 넣은 냉면육수가 유통되면서 냉면애호가들에게 좋아진 점은
집에서 냉면 끓여먹기가 좋아졌다는 점이다.
면 자체도 생면으로 오래 삶지 않아도 되고 쫄깃한 질감도 잘 살아 있고
그냥 비닐봉지 뜯어 대접에 붓기만 하면
밖에서 사오천원에 한 그릇 먹는 냉면과 비슷한 맛을 이천원 정도에 먹을 수 있다.
오늘 그 '냉면전문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면서
앞으론 소문난 맛집이나 비싸더라도 진짜 격식있는 집이 아니면 냉면 밖에서 먹지 말고
사다가 끓여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생각은 이어져
30개월 넘는 미국소가 안 들어와야 안심하고 냉면을 먹는데, 했다.
원산지 표시네, 월령표시네 다 있어도
그래서 그거 보고 한우 골라 먹고 어린 소 골라 먹는 건
직접 고기 자체를 소비하는 사람이거나 돈 많이 받는 고급식당들이지
비닐팩에 넣어 유통시킬 육수 낼 사람들이
고급고기 골라다가 '쇠고기 베이스'를 만들 이유는 없다.
육수만 그러랴, 과자 라면 등등 가공식품 양념에 쓰이는 '쇠고기 베이스'가 다 그렇겠지.

소는 12개월이면 새끼를 밸 수 있단다.
그래서 보통의 암소는 12개월내지 14개월에 첫 임신을 하고 24개월 정도 되면 첫 새끼를 낳는단다.
그러니까 30개월 이상 된 소라는 것은 새끼를 두 번 이상 낳은 소라고 보면 된단다.
그런데 조중동과 한나라당 엠비 등이 잘 말해 주었듯이
대부분의 육우는 20개월 좀 넘으면 잡는단다.
그 이상 키우면 사료값이 더 나가지 킬로수는 잘 안 느니까.
그러니까 30개월 넘어 살아있었던 소는 새끼낳는 역할로 지정된 소란다.
소는 새끼를 여섯번에서 일곱번까지 낳을 수 있단다.
그러니 30개월 된 소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 비정상적인 경우라고 한다.
새끼 잘 낳고 건강한 놈을 잡을 이유는 없으니까.
육우였으면 벌써 그 전에 잡혔을 것이고.
그러니까. 30개월 넘는 소를 수입한다는 것은
육우가 아니라서 살려둔 놈이 아프거나 늙어서 죽인 경우에도 수입해다 먹겠단 소리란다.
30개월 넘는 소를 수입한다 해도 32개월짜리 이런 건 별로 없을 거고
오히려 60개월 70개월짜리 소가 들어올 것이라고 한다.
32개월짜리라고 60개월보다 더 좋아할 건 없다.
생산력 좋은 어미소를 갑자기 잡았다는 것도 좋은 징조는 아니니까.

그러니까, 미국 소가 본격적으로, 월령제한 없이 수입유통되면
우리는 제대로 된 냉면을 먹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바다 건너 온 육칠십개월짜리 소를 삶은 국물에 글루타민산나트륨(이른바 합성조미료. 현대인의 나트륨 과다섭취원인은 소금보단 요놈의 기여가 크단다. 짠맛도 없이 나트륨을 주입하므로. 소금은 알고나 먹지.)과 고추가루 마늘 팍팍 넣은 냉면을 먹기 싫다면
집에서 들통에 고기 삶아 국물내고 동치미 국물 섞어 스스로 맛을 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음식에 점점 품위가 없어져가는 세상이다.
인드라의 그물은 모든 코가 연결돼 있어서 한 코의 수정이 울면 모든 코의 수정이 운다나.
그러니
땅과 풀,물,닭,소,사람의 순환이 살아있고 깊은 맛이 살아 다대기가 필요없던 시절 사람들보다
품위없는 음식을 먹는 우리는
분명 품위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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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엄쥐 2008/08/03 17:24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냉면으로 시작해서 30개월 미국소로 끝나는 글이군 ㅋㅋ
    대단한 전개야 ㅋ 달필가 유씨 ㅋㅋ
    반가비~~ㅎ

  2. asuwish 2008/08/04 18:41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리나야, 서울 올라오면 연락혀. 같이 맛난 정통 평양식 메밀냉면을 먹으러가자.
    내 이래봬두 친가가 평안도 출신이라 냉면집 지도를 쫙 꿰고 있단다.
    근데 요새 서울 냉면값 참 비싸더군. 거의 스파게티에 육박...-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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