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두꺼운 책이라 읽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필 목이 아파서 책 읽기도 쉽지 않은데...
나를 엄청나게 매료시키는 책이다.
가톨릭 수도자들은 정결과 순명, 청빈의 서약을 하게 된다.
로레토 수녀회 수녀로 출가하신 데레사 수녀님도 이 서약을 하셨다.
그런데 수녀님은 보통의 수녀회보다도 더 완벽한 가난, 극빈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여
인도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인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수도회를 창립하셨고,
그 결과는 많은 세상사람들이 아는 것과 같이 되었다.
수녀님이 끝없이 기도하며 예수님과, 때로는 주위의 성직자와 수도자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가슴을 울린다.
나는 꽤나 여러번 수도자의 삶을 권유받기도 했고 스스로 생각해보기도 했으며
그 고민은 (결혼을 꿈꾸고 있는) 현재에도 진행 중인데,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묻고 있다.
하고 싶은가?
할 수 있는가?
글쎄, 결국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는
결혼식을 올리거나 수녀원에 들어가는 그 날이 되어야 알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렇다.
나는 수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나는 청빈의 서약을 할 자신이 없다.
나는 완벽하게 나를 죽이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자신이 없다.
나는 자발적으로 고통이나 가난을 선택할 자신이 없다.
실제로 수도자나 성직자가 된 사람들은 그러더라.
'내가 어떻게..'라는 생각에 주저하였으나 어느 순간 그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오더라고.
마더 데레사 수녀님도,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찾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으나
하느님께서 '네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너를 택했다'라고 응답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확신을 얻은 순간,
수녀님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그 일이 실패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나아가셨다는 것이다.
글쎄,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나는 어느날 수녀원에 들어가 있겠지.
그렇지 않다면 밖에서 계속 살아가겠지.
어디서 살거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지.
어쨌거나, 수녀복을 입은 나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아.
수녀님들 옆에서 일을 도우며 웃고 있는 사복의 나는 잘 상상이 되지만.
난민촌이나, 난민이나 다름없는 삶을 사는 이들 곁에서 뭔가를 해보는 건 늘 꿈꾸지만
그 후에는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또한 꿈꾼다.
공항에 마중나온 남편과 아이들, 혹은 오지의 소박한 집에 함께 살며 자기 활동을 하는 남편.
그런 좀 '먼' 이야기들 말고,
이 책을 읽으면서 얻고 있는 가장 소중한 깨달음은
한의사 됨에 관한 것이다.
책의 이야기가 진행되어
데레사 수녀님이 새로운 수녀회를 창립하여 빈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될 수록
나는 나를 한의사로 부르신 것이 하느님 뜻이라는 확신이 짙어간다.
그러니 더이상 투덜대지도 나약한 소리 하지도 말 일이다.
하느님께서 부르셨으니 하느님께서 결말지으실 터.
난 그냥 단순하게 믿고 공부하면 되는 거다.
외워지건 말건
성적이 어떻게 나오건 말건
명의가 되건 말건.
졸업을 하고, 면허가 나오면
하느님께서 알아서 쓰시겠거니.
요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아래의 성경구절이 생각났다.
예루살렘 입성 (루가복음 19장 28-35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올리브 산 중턱에 있는 벳파게와 베다니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앞질러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맞은편 마을로 가라. 거기에 가보면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터이니 그 나귀를 풀어오너라.
혹시 누가 왜 남의 나귀를 푸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그들이 가보니 과연 모든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그래서 나귀를 풀었더니 나귀 주인이 나타나서 "아니, 왜 나귀를 풀어가오?" 하고 물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나귀를 끌고 와서 나귀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예수를 그 위에 모셨다.
어이 heraus나귀씨,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러니 일단 사람을 태울 수 있는 키높이까지 여물먹고 성장 좀 하자고.
OK?
하필 목이 아파서 책 읽기도 쉽지 않은데...
나를 엄청나게 매료시키는 책이다.
가톨릭 수도자들은 정결과 순명, 청빈의 서약을 하게 된다.
로레토 수녀회 수녀로 출가하신 데레사 수녀님도 이 서약을 하셨다.
그런데 수녀님은 보통의 수녀회보다도 더 완벽한 가난, 극빈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여
인도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인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수도회를 창립하셨고,
그 결과는 많은 세상사람들이 아는 것과 같이 되었다.
수녀님이 끝없이 기도하며 예수님과, 때로는 주위의 성직자와 수도자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가슴을 울린다.
나는 꽤나 여러번 수도자의 삶을 권유받기도 했고 스스로 생각해보기도 했으며
그 고민은 (결혼을 꿈꾸고 있는) 현재에도 진행 중인데,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묻고 있다.
하고 싶은가?
할 수 있는가?
글쎄, 결국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는
결혼식을 올리거나 수녀원에 들어가는 그 날이 되어야 알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렇다.
나는 수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나는 청빈의 서약을 할 자신이 없다.
나는 완벽하게 나를 죽이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자신이 없다.
나는 자발적으로 고통이나 가난을 선택할 자신이 없다.
실제로 수도자나 성직자가 된 사람들은 그러더라.
'내가 어떻게..'라는 생각에 주저하였으나 어느 순간 그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오더라고.
마더 데레사 수녀님도,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찾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으나
하느님께서 '네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너를 택했다'라고 응답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확신을 얻은 순간,
수녀님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그 일이 실패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나아가셨다는 것이다.
글쎄,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나는 어느날 수녀원에 들어가 있겠지.
그렇지 않다면 밖에서 계속 살아가겠지.
어디서 살거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지.
어쨌거나, 수녀복을 입은 나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아.
수녀님들 옆에서 일을 도우며 웃고 있는 사복의 나는 잘 상상이 되지만.
난민촌이나, 난민이나 다름없는 삶을 사는 이들 곁에서 뭔가를 해보는 건 늘 꿈꾸지만
그 후에는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또한 꿈꾼다.
공항에 마중나온 남편과 아이들, 혹은 오지의 소박한 집에 함께 살며 자기 활동을 하는 남편.
그런 좀 '먼' 이야기들 말고,
이 책을 읽으면서 얻고 있는 가장 소중한 깨달음은
한의사 됨에 관한 것이다.
책의 이야기가 진행되어
데레사 수녀님이 새로운 수녀회를 창립하여 빈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될 수록
나는 나를 한의사로 부르신 것이 하느님 뜻이라는 확신이 짙어간다.
그러니 더이상 투덜대지도 나약한 소리 하지도 말 일이다.
하느님께서 부르셨으니 하느님께서 결말지으실 터.
난 그냥 단순하게 믿고 공부하면 되는 거다.
외워지건 말건
성적이 어떻게 나오건 말건
명의가 되건 말건.
졸업을 하고, 면허가 나오면
하느님께서 알아서 쓰시겠거니.
요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아래의 성경구절이 생각났다.
예루살렘 입성 (루가복음 19장 28-35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올리브 산 중턱에 있는 벳파게와 베다니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앞질러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맞은편 마을로 가라. 거기에 가보면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터이니 그 나귀를 풀어오너라.
혹시 누가 왜 남의 나귀를 푸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그들이 가보니 과연 모든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그래서 나귀를 풀었더니 나귀 주인이 나타나서 "아니, 왜 나귀를 풀어가오?" 하고 물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나귀를 끌고 와서 나귀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예수를 그 위에 모셨다.
어이 heraus나귀씨,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러니 일단 사람을 태울 수 있는 키높이까지 여물먹고 성장 좀 하자고.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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