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aus kommt heraus

* 그 분 생전에 내가 언제 한 번 그 분을 뵈었던 것도 아니고
그 분에 대해 그렇게 신경쓰고 산 것도 아니었다.
작년 8월부터 위독하셨고 10월엔 돌아가실 뻔도 했다는데, 모르고 살았다.

굳이 기억을 더듬자면
고등학교 때였나 '세상 사는 이야기'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얼핏 나고
그 외 여러 에세이집들에서 추기경님에 관한 에피소드를 읽은 기억도 나고
98년 정진석 추기경(당시 대주교)님으로 서울대교구장이 바뀌기 전까지
미사 때마다 별 생각 없이 '우리 주교 스테파노와...'라는 문구가 들어간 미사통상문을
별 생각없이 외웠었고...

그런데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자막을 처음 보는 순간
'우린 이제 어떡하지!' 하는 느김이 드는 건 뭐람.
가슴이 막 무너져내리는 느낌은 뭐람.

* 월요일부터 울엄마는 TV쟁이 아줌마가 되었다.
거의 하루종일 평화방송 TV를 켜고 계셨다.
평화방송은 월요일 저녁 추기경님 선종 직후부터 추기경님 추모방송만을 내보냈다.
추기경님의 생전모습이 담긴 다큐들과 추기경님 장례와 관련된 실황화면,
그리고 추기경님 소식으로 가득찬 가톨릭 뉴스.
명동성당에서 진행 중인 연도(위령기도)를 평화방송이 중계를 해 줘서
엄마는 연도도 여러 번 바치신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연도를 싫어하므로 한 번도 안 바쳤다.

* 유명하신 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방송을 보며 하는 생각이 있다.
저렇게 기록이 많아서, 저 유족들은 좋겠다는 생각.
아빠 돌아가시고 한 1년 있다가였나, 아빠 목소리가 생각이 안 난다고 우울해 한 기억
그 후로... 쭉이다. 아빠 목소리를 명확하게 떠올려낼 수가 없다.
(그렇지만 만약에라도, 정말 만약에라도 아빠 목소리를 다시 들으면
금방 알아들을 것 같기는 하다.)
유명하신 분들은 저렇게 영상과 음성 기록이 많이 남아있으시니
유족들은 좋겠구나, 그런 생각.

* 수요일 저녁에는 대전교구의 추기경님 추모 미사에 다녀왔다.
사람이 정말 많았다.
대전교구 주교좌 성당인 대흥동성당은
성전의 크기는 명동성당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조금 더 큰 듯하지만
인구도 적고 유동인구마저 서구 일대로 내어줘 버린 구도심에 위치하는지라
평소엔 주일미사에 가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고 빈 자리가 많은 편이다.
그런데 그 날은 의자마다 좀 과하다 싶게 사람들이 껴앉고도
뒤쪽 통로에 새까맣게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추기경님을 의식하며 살았거나
개인적으로 추기경님과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은 아닐 거다.
그런데 그 분들도 나처럼,
추기경님이 돌아가셨다니까 마음이 무너져서
그렇게 새까맣게 모여왔겠지.
참 놀라운 일이다.
한 사람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렇게 들어갈 수도 있구나.
흔한 비유지만, 산소가 있을 땐 모르다가 없어지면 큰일난다나,
꼭 그런 모양으로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하고 계셨던 모양이구나.

* 대전교구 추모미사에 참석하고, 명동성당에 이어지는 추모인파를 보면서
정말 실감했다.
정말 크신 분이셨구나.

한국사회에서 향후 얼마간
그 어떤 어르신이 돌아가신다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추모행렬을 볼 수 있을까?

* 평화방송에서 보여주는 다큐들을 보면서,
또 한 번 실감한다.
아, 정말 좋으신 분이셨구나.
아 정말, 소중하신 분이 가셨구나.

* 이 상황에서 가장 힘들고 애통한 건 정진석 추기경님이 아니실지.
너무나 큰 어른이 가시고
이제 홀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최고 어른으로서의
모든 책임과 모든 관심을 다 '뒤집어쓰시게' 됐으니.
서울대교구장을 맡으신지는 10년도 더 되셨지만
그래도 그간 '혜화동 할아버지'가 계셔서
정추기경님께는 마음 한 구석이 든든하시지 않았을까.
이제 지붕 없이 뜨거운 태양을 마주해야 하는 그런 기분이시지 않을까.

주님 정진석 니꼴라오 추기경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멘.

*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셔서 마음이 무너지는 걸 보고서야
내 마음 한 켠에 그 분이 계셨음을 알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분이 돌아가셨기에 그 분이 내 맘 속에 쏙 들어오셨다.
생전에야, 나같은 보통사람 날라리 신자가 언제 그 분 뵐 일이 있었을까.
그런데 이제 돌아가시고 나니
그 분을 옆에서 모시던 성직자 수도자들이나,
기자 대동하고 그 분께 찾아갈 수 있던 유명인들이나,
그 분께 청을 드려 가난한 형제들 곁으로 불러 모시던 복지기관장들이나,
그런 '특별한' 분들하고 나하고,
차이가 없게 된 것이다. ㅋ
육안으로 못 뵙는 것도 똑같고
기도 중에 만날 수 있는 것도 똑같고.

내 맘에 쏙 들어오신 추기경님
우리 모두를 위해, 그러니까 나도 위해 ^^ 기도해 주세요.
사랑합니다.

주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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