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aus kommt heraus

언어는 도구이다.
유창하게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언어 자체를 알기도 해야 하지만,
언어에 담을 컨텐츠들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말하자면, 평범한 세 살짜리가 영어를 완벽하고 유창하게 구사한다고 해 봤자,
평범하게 학교 교과서만 충실히 공부한 고등학생보다
구사하는 영어의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
세 살짜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과 이해하고 있는 개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세 살 짜리가 글을 읽는다고 해도 얼마나 긴 글을 읽고 얼마나 깊이 이해하겠는가.
발음이야 좋겠지. 영어로 오는 자극에 영어로 반응하는 속도도 빠르겠고.
하지만 그래서 뭐?
그 세 살짜리가 영어로 할 수 있는 일과 고등학생이 영어로 할 수 있는 일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 멀쩡한 한국 애들을 두서너 살부터 잡아 족쳐가며 영어를 가르치는 건
뻘짓 중의 뻘짓이다.
그렇게 하면 아이는
나이와 함께 수직적으로 지식과 개념의 성장을 하지 못한 채
수평적으로 두서너 살의 수준에 불과한 영어와 한국어를 넘나들 뿐이다.
게다가 그렇게 잡아족치느라고 아이 마음속에 자리잡힌 상처는
아이의 정서와 사고력의 성장을 방해해
아이를 더욱 더 두서너 살 수준에 묶어둘 것이다.

예전에 강남에 살 적에 어떤 꼬마애를 봤는데
한 다섯 살 됐으려나.
엄마가 그렇게 두세 살부터 족쳐서 영어만 가르친 애였다.
엄마가 생식원 원장이랑 상담하고 있는 동안 이 꼬맹이는
생식원에 딸린 운동하는 방에서 팔다리를 버둥거리면서 울었다.
"마미~ 아냐~ 아냐~ 아냐~'하며 울었다.
"Mommy~ No~ No~ No~"가 하고 싶은 말이었겠지. 아니면
"엄마~ 싫어 싫어 싫어~"거나.
그러더니 물건을 마구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거기서 하는 운동은 마룻바닥에 누워서 하는 거다.
물건을 집어던지면 누워있는 다른 사람들이 위험하다.
(안 그래도 물건 집어던지는 건 여러 모로 위험하고 안 좋은 짓이지만)
녀석이 집어던진 물건이 울엄마를 덮칠 뻔했을 때 참다 못해 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더니
그제야 기가 죽어서 제 엄마에게 가더구만.
생긴 건 아주 귀엽고 똘방하게 생긴 애였다.
옆방에서 제 아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던 - 알려하지 않 그 애 엄마가
아들에 대해서, 뭘 놓치고 있는지, 굳이 내가 해설 달지는 않겠다.

공지영의 새 에세이집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를 읽었다.
나는 요즘 공지영에게 아주 푹 빠졌다. 그의 책들이 다 너무 좋다.
어쩌다 남의 미니홈피 등에서 발견하는 그의 강연 내용도 너무너무 좋다.
이번 에세이집도 역시 좋았다.
그가 '가며운 얘기만 쓰겠다'고 선언하고 신문에 연재했던 에세이란다.
여러 글이 다 좋았지만 유독 눈길을 잡아끌었던 글의 제목은 '나는 아직도 철없는 엄마일까'이다.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가 사교육과 특히 영어교육 열풍에 대해 쓴 이야기.

그녀는 둘째 아이를 데리고 독일에 1년간 체류할 때, 둘째를
독일학교가 아닌 영어를 쓰는 외국인 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애를 데리고 가서 교장에게 한국 아이가 있는 반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단다.
아이는 여기에 영어공부하러 온 것도 아니고 원해서 온 것도 아니고
그냥 부모를 따라왔을 뿐이므로
아이가 여기서 스트레스 안 받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그래서 아이에게 한국 친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그러니까 그녀가 아이를 외국인 학교에 넣은 건,
흔히 요즘 부모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독일어 배워 뭐하냐 기회될 때 영어학교 가서 영어 배워라'가 아니라
독일 학교 가면 한국 애가 없을 것 같으니까
한국애를 만날 수 있는 학교로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 학년에 하나 있는 다른 한국애의 부모가 반대하여 무산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 둘째 아이는 외국인 학교를 1년 다니고 귀국한 후로도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뭐? 라고 그녀는 반문한다.
그래서 뭐.
그녀의 아들은 내가 봤던 강남 아줌마 아들보다 훨씬 건전하고,
훨씬 수준높은 사고력을 가지고 있을 건데.
그런 그녀가 어떻게 철없는 엄마겠는가. 철이 없는 건 압구정동 그 아줌마겠지.

그 글 전체에 걸쳐 아이들 교육에 대한 더 폭넓은 생각들이 들어있고,
모두 내가 열광할 만한 생각들이지만,
영어가 하도 문제시 되는 시대인지라,
게다가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영어' 넣어서 붙여놓은지라
영어에 대해 쓴 부분 일부만 인용.


독일에 있을 때 아이를 학ㄱ교로 보내고 집에서 텔레비전을 틀면 온통 내가 모르는 독일어 방송이었다. 그래도 10년동안 배운 언어라고 가끔 영국 방송인 BBC를 보곤 했는데 그 때 <세계 석학들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인도, 프랑스, 중국 혹은 스웨덴, 스페인 등등의 석학이란 사람들이 나왔다. 놀라웠던 것은 그 석학들이 인터뷰하는 영어는 놀랍게도 '발음이 아주 후지다'는 것이었다. 나라에 따라 [r]이, 혹은 [th]나 [f] 혹은 [v]가 그랬다.

하지만 영어발음이 '좋은' 사회자는 그들의 말을 경청했고,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이의 소통과 권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영어가 그리 유창하지 않아 더듬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사회자는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문제는 영어도, 영어 발음도 아니고 그들이 이룬 성취에 있었다. 나는 그 장면들을 가슴에 새겼다. 유학생들의 말도 떠올랐다.

"처음에 와서 그 사람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들을 때마다 내 발음에 문제가 있나 싶어서 몇 번씩이나 다시 말하고, 말하고 했어요. 삼 년쯤 지나면 알게 돼요. 발음은 거기서 거기고 내 얼굴은 누가 봐도 외국인이니 문제는 그들이 내 말을 알아듣고 싶은지 아닌지에 있다고 말이지요. 유학 와서 오히려 느끼는데, 우리말 실력이 달려요. 논문 쓸 때 내가 정말 독일어가 아니라 우리말을 못하는 걸 절감해요."

외국 여행을 나가보면 알 것이다. 우리에게 돈을 받아내는 사람들이 우리의 언어에 얼마나 겸손한지를. 또 외국에 나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우리의 언어를 경멸하고 조롱하려고 들면 그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의 언어를 가지고 우리를 바보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지 말이다.

내 친구의 이모는 하와이에 20년째 살고 계시는 예숫다섯 할머니인데 지금도 하와이의 어떤 레스토랑에 가도 손가락으로 자기가 앉고 싶은 자리를 가리키며 당당하게 말한다고 한다.

"저기, 창가에 제일 좋은 자리를 내게 줘요."
(이게 다 영어가 아니라 우리말이다.)

그 이모는 옷을 잘 차려입고 아름다운 핸드백을 들고 웃는다고 했다. 그러면 그 레스토랑의 모든 웨이터들이 할머니의 손가락이 지정하는 자리를 내어준다고 했다. 그러면 이모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영어로 감사를 표한다고 했다. [th]발음이 한국식은 "땡큐"말이다. 물론 아름다운 웃음과 함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202-203쪽




공지영 같은 작가가 있어서
우리 사회는 참 많은 걸 벌고 있다고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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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earl 2009/03/04 20:58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구구절절 동감이야. 사실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영어가 점점 더 공용화 되면서, 과연 제대로 된 영어발음이나 표준 영문법이란 게 존재하는가 자체가 의문인 시대가 왔다고 하더라고. 발음은 좀 못해도 자신감 있게 또박또박 말하는 게 중요한 듯~~엄마한테 "마미"라고 부르는 한국 아이가 있다는 게 너무 생소한 걸!

    • BlogIcon Heraus 2009/03/06 15:42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그치. '표준' 영어란 대체 뭘까, 그거 아주 말하기 어려운 문제지. ㅋㅋ

      엄마한테 마미라고 해도 말이나 정확하게 구사하면 괜찮지, 내가 본 애처럼 마미한테 영어와 한국어 어법이 혼재된 언어를 쓰는 아이 이야기 공지영 글에도 나오더라구. 사람들이 정말, 중요한 걸 많이들 놓치고 사는 듯. 그리고 영어장사하는 사람들, 각성 좀 많이 해야 할 듯.

  2. guedol 2009/03/18 03:21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기본적으로 외국에서 돈을 쓸 때는 물론 영어를 못해도 되지.. 대신 물건을 사주고 그네들의 생계에 보탬이 되어 주는 것이니 그나라 말을 못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는 것 같아. 근데.. 아마 공지영씨의 글에 나오는 그 이모분의 좋은 핸드백은 이모분과 연관되어 있는, 다른 사람이 하와이에서 영어로 물건을 팔고 사업을 하면서 번 돈으로 산 게 아닐까.. 외국에서 살면서 영어문제로 항상 고민인 나로서는 그 할머니의 미소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고, 좀 게으르게 느껴지기도 해. 하와이에서도 아마 친구분들은 모조리 한국사람이겠지. 외국어를 할 수 있으므로써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경험들을, 나도 모르게 결정되어 내 안에 자리잡은 내 나라만의 사고방식이나 정체성에서 더 확장될 수 있는 기회들이 없었을 것 같구.. 압구정 아줌마보다는 공작가님의 영어관에 훨씬 더 동의하지만, 어쨌든 다른 나라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인듯. ( Glass I가 독일어를 아름답게 하고 그 나라를 통해 더 넓게 생각하듯이 말야.)
    발음에 대해서.. 학교에는 미국교수보다 남미, 유럽, 중국, 한국 등에서 온 교수들이 훨씬 더 많아. 발음에 대해 문제삼는 사람은 없어. 미국사람도 지역에 따라 발음이 정말 다르거든.. 아예 처음 들으면 못알아 들을 정도로.. 하지만 다들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를 한다는 게 중요.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의 인토네이션이나 강세는 (발음 자체가 아니라) 굉장히 이국적이라서 알아들게 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 외국인의 영어는 어차피 문장 자체로 이해되는 것이라서 r, th, l 머 이런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닌 듯. (영어사용자가 문장을 듣고 연결해서 아 이 친구가 이런 말을 하는구나 라고 파악하지 단어 하나하나의 완벽한 발음을 통해 알아듣는 것이 아님) 그리고 발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리스닝. 영어를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리 쉽게 얻어지지 않는 것 같아. 남의 말을 먼저 들을 수 있을 때, 더 잘 말 할수 있는 건데..
    학부/대학원 유학생과 석학에 대해서는 참 할말이 많다.. 한 분야의 석학이라면 언어의 문제는 정말 가소로운 것일 수 있으나 유학생으로써 니가 내 말을 알아듣고 싶은지 아닌지에 달려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배우는 자세가 아닌 것 같아. 나 또한 매번 커피를 주문하고 물건을 살 때에조차 다시 묻는 경우가 허다하고,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히스패직 계열의 점원등이 아시아인을 경멸하기 때문에 다시 묻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어. 하지만, 유학생이 영어권에서 배우고 그 배움을 영어권 나라에서 풀어먹자고 하는 경우라면 내 영어를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은 니가 나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다 식의 생각이 매우 위험해 보여. 배우는 것 자체가 소중하지만 결국 한국에서 부모한테 돈 받아다가 미국대학 재정에 기여하고 만 것이라 배움이 그저 배움에 그친 것이지..
    내 영어.. 완전 저질영어인데.. 반성하구 노력해야지..

    • BlogIcon heraus 2009/03/19 06:09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하도 오랜만이라 이 닉이 누구였나 한참 생각했다.^^

      "발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것도 어느 범위에 서느냐에 따라 성립하고 안 하고 할 수 있지. 어차피 언어란 음성요소와 의미요소의 결합이니, 산을 물이라 하고 물을 산이라 하는 수준에서 뜻만 높다고 알아먹을 일은 아니니까.

      네가 말했듯이, 돈을 쓰러 갔는지 벌러 갔는지, 배우러 갔는지 가르치러 갔는지에 따라 많은 상황이 바뀌지. 공지영 친구 이모의 비싼 옷과 비싼 핸드백은 내가 돈 쓰러 온 사람이요, 라는 걸 알려주는 것이니까 모두가 친절했겠고, BBC에 출연한 석학은 가르치는 입장이니까 모두가 귀기울였겠고.

      그러니까 영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 영어라는 그릇에 담을 컨텐츠가 더 문제라는 이야기지, 그릇이 없거나 깨져도 그만이라는 말은 아니지. '마미, 아냐 아냐 아냐' 하던 넘은 그 엄마가 본차이나급 그릇을 빚으려고 했는지 몰라도, 그놈의 본차이나가 손톱만한 인형찻잔이라 아무 데도 쓸 데 없다는 게 문제겠지. 독일 유학생의 '내 말을 알아들을 의지'라는 것도, 내가 저들에게 줄 것이 많은 상황이라면 내 발음이 별로라도 저 쪽이 기를 쓰고 알아듣고 내가 저들에게 줄 것이 없다면 저 쪽이 알아들으려는 의지가 없다는 말 아닐까 하는데.

      사람들은 어릴 때 멀티링구얼한 환경에 살면 저절로 두세 언어가 얻어진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부모의 적극적인 교육적 개입 없이는 모든 언어에 무능하고 인지 장애까지 있는 사람을 만들기 딱 좋거든. (요즘 실제로 한국의 많은 결혼이민자 및 외국인 노동자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한국에서 외국어 장사들은 그런 거 절대 이야기하지 않지...

      인토네이션 같은 거, 언어학 용어로 '비분절 요소'는 한국인들이 어느 언어를 배우든 참 취약한 부분인데, 문제는 한국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는 사람들도 중국어 강사 빼놓고는 그 부분을 잘 강조 안 하지. 애가 r발음 못한다고 애 혀 찢는 수술한다고 이슈가 됐던 적은 있지만 비분절요소에 대해서 한국인 강사나 사업자가 강조하는 것도 별로 본 적 없고 이슈가 됐던 적도 없지. 중국어 사용자들은 외국인이 중국어를 할 때 틀린 성조라도 성조를 넣어서 말하는 것을 아무 성조도 싣지 않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잘 알아듣는다고 하고, 영어 같은 강세 언어 사용자들은 한국인들처럼 강세와 리듬상의 강약을 잘 살리지 못하는 영어를 알아듣기 힘들어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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