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디오 고장. -_-;;
CD를 인식하지 못한다. 어떤 씨디를 넣어도 'NO DISC'라고 뜬다.
그렇다고 요즘 과열양상을 보이는 내 노트북에 씨디 돌리는 열기까지 더하기는 싫고...
9월 첫 토요일 친구 결혼식에서 축가로 이소라의 '청혼'을 부르기로 해서
열심히 듣고 부르고 있었는데 들을 수가 없어서
인터넷에서 노래를 검색했다.
요즘은 노래를 실어놓은 블로그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이것저것 듣다 보니
이소라가 '청혼'을 부르는 동영상을 두 종류 보게 됐다.
음반에 있는 노래는 좀 정형화되고 박자가 딱딱 맞춰 떨어지는데
이소라가 직접 TV에 출연해서 부른 것은 훨씬 생동감 있었고
같은 노래지만 다양한 변주가 있었다.
화악, 알껍질이 깨지는 느낌이 들면서
친구 결혼식에서 노래 부를 일이 더 자신있어졌다.
어차피 나는 정형화된 반주파일을 가져다 불러야 할 테니
무대 위에서 반주자들과 소통하고 관객과 소통하는 가수처럼은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겠지만
너무 음반처럼 똑같이 부르고 반주에 딱 떨어지게 부르려고 긴장하지 않아도 되겠다.
오디오가 고장나서 인터넷을 검색하고 이 동여상을 발견했으니
어떤 면에선 고장난 게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봉투 접수도 아니고,
'가방 모찌'도 아니고
축가를 맡겨 준 친구에게 감사. ^^
2.
그러다가
결혼식 축가 혹은 청혼 이벤트용 노래로 인기있는 곡목을 열거한 블로그에서
'다행이다'라는 이적의 노래 제목을 보았고
그래서 이번엔 이적의 '다행이다'를 실은 블로그를 찾아내
이적이 직접 피아노치며 노래부르는 동영상을 보았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댈 아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란 걸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 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줄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댈 아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란 걸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가 있어서 내가 위로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또한 내가 그대를 위로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무의미하고 견디기 힘들었던 일상 살이가
그대가 있기에 의미를 지닌다.
이 얼마나 가슴 절절한 사랑의 노래인가.
이 노래를 부르는 이적의 목소리는 정말 가슴속을 파고든다.
파고든다는 표현이, 그 어떤 표현보다도 딱 맞다.
강아지처럼 아기처럼 애인처럼
가슴 속으로 체온과 질량을 가진 것이 파고드는 느낌...
이적이 직접 작사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다행이다'라는 말을 하려고 골라낸 항목들 또한 절절하게 감각을 자극한다.
그대의 머릿결을 어루만질 수 있어서,
그대와 나눠 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이 노래가
여성들이 (예비) 신랑에게 듣고 싶어하는 노래 1위라나,
어떤 블로그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런데 나라면 이 노래를 웬만한 남자에게 부르라고 하지 않겠다.
이 노래 너무 어렵다.
이적이 부른 것 같이 절절히 파고들게 부르려면
진짜 프로 가수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냥 웬만하게만 부르기도 결코 쉽지는 않아보이는데
웬만하게 불러서는 감동보다 실망할 것 같다.
이적의 포스가 너무 강해서.
3.
이적은 아름답고
이적이 부른 '다행이다'도 아름답지만
솔직히 이 노래 가사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응?)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란 걸
이라는 부분.
나랑 가까운 사람들하고는 종종 이야기하지만
나는 회사다닐 때 너무 괴로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하루가 시작했다는 사실에 눈물부터 났던 시절..
곱게 자라 -_-;;; 하루하루의 생존이라는 문제에 진짜로 직면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고상하고 위대한 것 좋아하는 기질이 있는 나는
늘 인간은 무언가 좋은 것, 이상적인 것을 위해 살아가는 거라고,
그저 입에 풀칠하고 살아가는 게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회사에 다니면서는 더이상 그런 생각을 유지할 수 없었다.
왜? 왜? 왜? 왜 이렇게 사는가? 인간이 살아간다는 건 뭔가?
초등학교 때 배운 '식물의 한살이' '배추흰나비의 한살이' 이런 것하고
'인간의 한살이'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나비가 되기 위해 배추를 먹고,
나비가 되어서는 배추 먹는 벌레를 만들기 위해 알을 낳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별 의미 없는 순환이 참 이상하고 우스워보였는데,
회사다니면서 보니 인간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회사 다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밥먹고 학교 다니고,
회사에 다니면서는 학교 다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애를 낳는다.
왜?
별달리 이유랄 건 없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그 때 나는
우리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부모들이
아주 부도덕하고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들은 태어났으니 그렇게 죽기 전까지 살아야 한다 치자.
자식은 낳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그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숨차게 달려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태어나지 않는 것만이 답이다.
저는 이미 태어났으니 죽기까지 달려가더라도
고통의 대열에 합류할 새 멤버를 또 만들어내지는 말아야 할 게 아닌가.
非문명사회에서 본능대로 사는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피임법이 이렇게 발달한 사회에 살면서!
그래 놓고서 자식한테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자식 된 사람들에게 '부모에게 감사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나는 사람들이 그럭저럭 밝게 살고 있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그 사람들은 이런 생각 안 하나?
사는 게 즐겁나?
아니, 즐겁다 쳐. 그게 무슨 의미인데?
즐겁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 살아갈 이유가 되는데?
생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고,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걸!
생각해 보면
나는 꼭 그렇게 삶이 엉망으로 힘겨워지기 전부터도
'무슨 의미인데?'라는 질문에 답이 나오지 않으면 못 견뎌했다.
그게 팍팍한 회사생활에 개인적인 문제까지 겹쳤던 그 시기에
극적으로 증폭된 것이었지.
아무튼 나는
삶에 위안을 주는 무엇무엇이 혹은 누구누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고통의 바다인 生을 긍정한다는 게
불가능한 인간이었다.
게다가 그 때 당시엔 삶에 위안을 주는 무엇무엇이라는 게 하나도 없었다. -_-;;;
그 때 만난 것이 요가였다.
그리로부터 나의 본격적인 종교적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노무 방황 그 전부터 이미 시작은 한 상태이긴 했지만...)
별 거 다 했다.
요가해서 해탈하고 신선될려고도 했고 -_-;;
조계종에서 수계도 받았고 (법명은 妙喜, 열반의 기쁨이라는 뜻이란다..)
어려서 세례 받은 가톨릭 신자이니 가정의 평화를 위해 미사도 대체로 꾸준히 다녔고
이상한 모임에도 잠깐 들어갔다 나왔다.
그러다 2007년에 마침내 가톨릭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내 삶은 재창조의 과정을 겪었고, 겪고 있다.
감사하게도.
그리고 더이상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삶에서 고통을 뺄 수 없지만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응?
이적 이야기하다 웬 내 인생관 이야기?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란 걸
그래 이거.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에,
원래는 무의미한 일상 하루하루가 의미있다는 말.
나는 솔직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머릿속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
생은 무의미하지만
천만다행히 그대가 있으니
이 무의미한 삶조차 참아낼 수 있어, 라면 이해는 간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제기는 하고싶다.
그렇다면 '그대'는 마약 비슷한 존재인가?
지치고 고된 하루하루, 생의 무의미를 잊게 해 주는 존재...
어쨌든 좋다.
이 노래의 화자는 그대가 나의 곁을 지켜주므로 고된 세상살이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그대가 먼저 죽으면?
그대가 나를 떠나버리면?
그대가 실종되기라도 하면?
그러면 그 날로 다시 무의미해지는가?
요컨대
그대가 아무리 좋아도
그대가 아무리 세상을 반짝이게 만들어도
근본적으로 자기 생의 내재적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대 때문에 무의미하지 않다'는 말은
너무 위험하다는 말이다.
어떤 남자가 나에게 그런 비슷한 말을 한다면
혹시 나 아니면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면밀히 조사한 다음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정신병원에 들여보내든가
행자가 끊길 위험에 처한 절을 찾아내서 행자로 들여보낼 거다.
너무 위험하다.
나는 그렇게 위험한 남자를 이승에 묶어두는 유일하고 절망적인 끈이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어떤 남자에게도
나를 위해 이 노래를 부르라고 하고 싶지 않다.
그저
훌륭한 음악인인
이적의 목소리로 즐기면 족하다.
4.
지난 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청년 성서 창세기 연수를 다녀왔다.
지난 학기에 성당에서 창세기 공부를 했는데
그 마무리하는 연수를 다녀온 것이다.
연수 가면 좋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는 말도 들었는데
나도 그랬다.
참 좋았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내 스스로 내 삶을 구기도록 만들고 있던 어둠을 캐냈다.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확신도 강해졌고
인생의 초점을 맞추기가 좀더 쉬워졌다.
삶이 반짝이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런 감동을 함께 나눌 수 없는 남자랑은
같이 살기가 참 심심하고 아쉽겠단 생각이 들었고...
하지만
결혼에 대해서 내가 전혀 고민하지 않아도
결혼할 때가 되면 모든 일이 알아서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당분간은 편안하게 공부에 집중해야지.
5.
시작은 뭐였더라?
그래, 오디오가 고장났다!
으으 귀찮아!
저거 들고 신탄진까지 나가야 돼!!
오디오 고장. -_-;;
CD를 인식하지 못한다. 어떤 씨디를 넣어도 'NO DISC'라고 뜬다.
그렇다고 요즘 과열양상을 보이는 내 노트북에 씨디 돌리는 열기까지 더하기는 싫고...
9월 첫 토요일 친구 결혼식에서 축가로 이소라의 '청혼'을 부르기로 해서
열심히 듣고 부르고 있었는데 들을 수가 없어서
인터넷에서 노래를 검색했다.
요즘은 노래를 실어놓은 블로그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이것저것 듣다 보니
이소라가 '청혼'을 부르는 동영상을 두 종류 보게 됐다.
음반에 있는 노래는 좀 정형화되고 박자가 딱딱 맞춰 떨어지는데
이소라가 직접 TV에 출연해서 부른 것은 훨씬 생동감 있었고
같은 노래지만 다양한 변주가 있었다.
화악, 알껍질이 깨지는 느낌이 들면서
친구 결혼식에서 노래 부를 일이 더 자신있어졌다.
어차피 나는 정형화된 반주파일을 가져다 불러야 할 테니
무대 위에서 반주자들과 소통하고 관객과 소통하는 가수처럼은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겠지만
너무 음반처럼 똑같이 부르고 반주에 딱 떨어지게 부르려고 긴장하지 않아도 되겠다.
오디오가 고장나서 인터넷을 검색하고 이 동여상을 발견했으니
어떤 면에선 고장난 게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봉투 접수도 아니고,
'가방 모찌'도 아니고
축가를 맡겨 준 친구에게 감사. ^^
2.
그러다가
결혼식 축가 혹은 청혼 이벤트용 노래로 인기있는 곡목을 열거한 블로그에서
'다행이다'라는 이적의 노래 제목을 보았고
그래서 이번엔 이적의 '다행이다'를 실은 블로그를 찾아내
이적이 직접 피아노치며 노래부르는 동영상을 보았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댈 아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란 걸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 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줄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댈 아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란 걸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가 있어서 내가 위로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또한 내가 그대를 위로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무의미하고 견디기 힘들었던 일상 살이가
그대가 있기에 의미를 지닌다.
이 얼마나 가슴 절절한 사랑의 노래인가.
이 노래를 부르는 이적의 목소리는 정말 가슴속을 파고든다.
파고든다는 표현이, 그 어떤 표현보다도 딱 맞다.
강아지처럼 아기처럼 애인처럼
가슴 속으로 체온과 질량을 가진 것이 파고드는 느낌...
이적이 직접 작사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다행이다'라는 말을 하려고 골라낸 항목들 또한 절절하게 감각을 자극한다.
그대의 머릿결을 어루만질 수 있어서,
그대와 나눠 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이 노래가
여성들이 (예비) 신랑에게 듣고 싶어하는 노래 1위라나,
어떤 블로그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런데 나라면 이 노래를 웬만한 남자에게 부르라고 하지 않겠다.
이 노래 너무 어렵다.
이적이 부른 것 같이 절절히 파고들게 부르려면
진짜 프로 가수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냥 웬만하게만 부르기도 결코 쉽지는 않아보이는데
웬만하게 불러서는 감동보다 실망할 것 같다.
이적의 포스가 너무 강해서.
3.
이적은 아름답고
이적이 부른 '다행이다'도 아름답지만
솔직히 이 노래 가사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응?)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란 걸
이라는 부분.
나랑 가까운 사람들하고는 종종 이야기하지만
나는 회사다닐 때 너무 괴로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하루가 시작했다는 사실에 눈물부터 났던 시절..
곱게 자라 -_-;;; 하루하루의 생존이라는 문제에 진짜로 직면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고상하고 위대한 것 좋아하는 기질이 있는 나는
늘 인간은 무언가 좋은 것, 이상적인 것을 위해 살아가는 거라고,
그저 입에 풀칠하고 살아가는 게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회사에 다니면서는 더이상 그런 생각을 유지할 수 없었다.
왜? 왜? 왜? 왜 이렇게 사는가? 인간이 살아간다는 건 뭔가?
초등학교 때 배운 '식물의 한살이' '배추흰나비의 한살이' 이런 것하고
'인간의 한살이'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나비가 되기 위해 배추를 먹고,
나비가 되어서는 배추 먹는 벌레를 만들기 위해 알을 낳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별 의미 없는 순환이 참 이상하고 우스워보였는데,
회사다니면서 보니 인간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회사 다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밥먹고 학교 다니고,
회사에 다니면서는 학교 다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애를 낳는다.
왜?
별달리 이유랄 건 없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그 때 나는
우리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부모들이
아주 부도덕하고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들은 태어났으니 그렇게 죽기 전까지 살아야 한다 치자.
자식은 낳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그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숨차게 달려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태어나지 않는 것만이 답이다.
저는 이미 태어났으니 죽기까지 달려가더라도
고통의 대열에 합류할 새 멤버를 또 만들어내지는 말아야 할 게 아닌가.
非문명사회에서 본능대로 사는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피임법이 이렇게 발달한 사회에 살면서!
그래 놓고서 자식한테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자식 된 사람들에게 '부모에게 감사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나는 사람들이 그럭저럭 밝게 살고 있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그 사람들은 이런 생각 안 하나?
사는 게 즐겁나?
아니, 즐겁다 쳐. 그게 무슨 의미인데?
즐겁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 살아갈 이유가 되는데?
생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고,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걸!
생각해 보면
나는 꼭 그렇게 삶이 엉망으로 힘겨워지기 전부터도
'무슨 의미인데?'라는 질문에 답이 나오지 않으면 못 견뎌했다.
그게 팍팍한 회사생활에 개인적인 문제까지 겹쳤던 그 시기에
극적으로 증폭된 것이었지.
아무튼 나는
삶에 위안을 주는 무엇무엇이 혹은 누구누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고통의 바다인 生을 긍정한다는 게
불가능한 인간이었다.
게다가 그 때 당시엔 삶에 위안을 주는 무엇무엇이라는 게 하나도 없었다. -_-;;;
그 때 만난 것이 요가였다.
그리로부터 나의 본격적인 종교적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노무 방황 그 전부터 이미 시작은 한 상태이긴 했지만...)
별 거 다 했다.
요가해서 해탈하고 신선될려고도 했고 -_-;;
조계종에서 수계도 받았고 (법명은 妙喜, 열반의 기쁨이라는 뜻이란다..)
어려서 세례 받은 가톨릭 신자이니 가정의 평화를 위해 미사도 대체로 꾸준히 다녔고
이상한 모임에도 잠깐 들어갔다 나왔다.
그러다 2007년에 마침내 가톨릭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내 삶은 재창조의 과정을 겪었고, 겪고 있다.
감사하게도.
그리고 더이상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삶에서 고통을 뺄 수 없지만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응?
이적 이야기하다 웬 내 인생관 이야기?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란 걸
그래 이거.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에,
원래는 무의미한 일상 하루하루가 의미있다는 말.
나는 솔직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머릿속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
생은 무의미하지만
천만다행히 그대가 있으니
이 무의미한 삶조차 참아낼 수 있어, 라면 이해는 간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제기는 하고싶다.
그렇다면 '그대'는 마약 비슷한 존재인가?
지치고 고된 하루하루, 생의 무의미를 잊게 해 주는 존재...
어쨌든 좋다.
이 노래의 화자는 그대가 나의 곁을 지켜주므로 고된 세상살이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그대가 먼저 죽으면?
그대가 나를 떠나버리면?
그대가 실종되기라도 하면?
그러면 그 날로 다시 무의미해지는가?
요컨대
그대가 아무리 좋아도
그대가 아무리 세상을 반짝이게 만들어도
근본적으로 자기 생의 내재적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대 때문에 무의미하지 않다'는 말은
너무 위험하다는 말이다.
어떤 남자가 나에게 그런 비슷한 말을 한다면
혹시 나 아니면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면밀히 조사한 다음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정신병원에 들여보내든가
행자가 끊길 위험에 처한 절을 찾아내서 행자로 들여보낼 거다.
너무 위험하다.
나는 그렇게 위험한 남자를 이승에 묶어두는 유일하고 절망적인 끈이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어떤 남자에게도
나를 위해 이 노래를 부르라고 하고 싶지 않다.
그저
훌륭한 음악인인
이적의 목소리로 즐기면 족하다.
4.
지난 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청년 성서 창세기 연수를 다녀왔다.
지난 학기에 성당에서 창세기 공부를 했는데
그 마무리하는 연수를 다녀온 것이다.
연수 가면 좋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는 말도 들었는데
나도 그랬다.
참 좋았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내 스스로 내 삶을 구기도록 만들고 있던 어둠을 캐냈다.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확신도 강해졌고
인생의 초점을 맞추기가 좀더 쉬워졌다.
삶이 반짝이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런 감동을 함께 나눌 수 없는 남자랑은
같이 살기가 참 심심하고 아쉽겠단 생각이 들었고...
하지만
결혼에 대해서 내가 전혀 고민하지 않아도
결혼할 때가 되면 모든 일이 알아서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당분간은 편안하게 공부에 집중해야지.
5.
시작은 뭐였더라?
그래, 오디오가 고장났다!
으으 귀찮아!
저거 들고 신탄진까지 나가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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