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aus kommt heraus

* 사람들은 늘 아프다.
언제나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는 죽어간다.

* 나는 사람들의 아픔에 눈을 돌리고 싶지 않다.
그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제발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건강하고
자기 손과 자기 발로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아파, 라며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 사실 아무도 내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간단하게
나의 삶은 나의 것이며 그들의 삶은 그들의 것이고
나고 죽고 병들고 건강한 것은 인간의 뜻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그냥 나의 일에 몰두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픈 누군가를 돌보느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려들어 환자 곁을 지켜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공포였다.
아픈 아빠를 1년 내내 간병하다 결국 떠나보낸 엄마의 딸이었던 내게.

* 참 이상도 하지.
그런데 나는 지금 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2년 몇 개월이 더 지나면 나는
면허를 가진 의사가 될 예정이다.
세상에나
그 때는 정말로 사람들이
자신의 아픔에 대해 나의 책임을 물으며 나를 찾아올 것이다.
원래 아는 사람들도
전혀 모르던 사람들도.
내 삶은 아픈 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채워질 것이다.

나는 어쩌다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인 것일까?
나는 그냥 여기에 오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저 간단하게
나의 삶은 나의 것이며 그들의 삶은 그들의 것이고
나의 고통은 내 몫이며 그들의 고통은 그들의 몫임을 인정하고
병과는 상관 없는 아름다운 것들,
가령
예술이나, 문학이나, 학문 같은
그런 것들에 매진해도 좋았을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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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earl 2009/11/12 23:23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하느님으로부터 귀한 쓰임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 나는 학문을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늘 의사처럼 세상에 공헌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을 가졌으면 더 보람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 BlogIcon Heraus 2009/11/15 19:39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pearl, 고마워. 그러나 학문이 의학보다 덜 보람되거나 세상에 공헌하는 힘이 약한 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해. ^^

  2. 랑랑 2009/11/13 02:40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대중예술을 추구하는 저는요, 제가 여기 오지 않았으면 대체 뭘 할 수 있었을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생각하게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이것밖에 없어요. 언니니까, 언니가 좋아하는 한비야 선생님 글을 빌어 얘기하자면, 결국 우리는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찾는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어쩌면 언니가 생각하는 '이 엄청난 일'이 유일하게 언니 가슴을 뛰게 했던 건 아닐까요? (물론 제 생각에도 아픈 사람들이 내게 온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무시무시한 일이지만... 전 결코 피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해서 일찌감치 이 일을 희망목록에서 지웠지만... 그래도 곱씹어 생각해 볼 수록, 다른 이의 삶을 구원하고 다른 이의 고통을 사라지게 해주는 건 정말 위대한 일이에요. 어쩌면 제가 글로써 하고픈 것도 그런 거고요. 언니처럼 직접적으로 하지 못하는 게 때론 무력하게도 느껴지는 걸요.)

    • BlogIcon Heraus 2009/11/14 22:15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빙고!
      무력감,
      그것 때문에 내가 여기 있게 된 것 같아.
      랑랑, 너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않아? 나도 대학신문 문화부였는데, 내가 글쓰기와 관련된 공모전 공고 보고 가슴 뛰어 보지 않았다면 이상한 거 아니야? 내가 쓴 글로 세상에 무엇을 해 보겠다고 꿈꿔 보지 않았다면 이상한 거 아니야? ^^
      그런데 그 길에 눌러있지 못했던 건 무력감 때문인 것 같아. 글쓰기 앞에서 내가 느끼는 무력감, 글이 세상에 대해 정말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무력감, 삶과 죽음과 아픔의 순간에서 느끼는 무력감, 내 아픔에 대한 무력감... 그래서 그 무력감이 싫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
      그런데 그놈의 무력감,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는(혹은 나처럼 나약한 인간한테는..) 본질적으로 평생 끼고 갈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는 거지. 어떤 의학이나 어떤 의사도, 전지전능할 수는 없고, 근본적으로 신의 영역인 생사 자체를 관장할 수는 없는 거지.

      랑랑보다 철이 없는 나는 아직도 가끔씩 벽에 부딪힐 때면 '내가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나, 이것보단 저것이 적성에도 잘 맞고 세상에 더 좋은 기여를 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해. 하지만 그게 이걸 때려치고 그걸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지진 않아. 그걸 했어도 나는 무력감에 무릎을 꿇고 말았을 거야. 그러니 지금 여기서 무력감에 맞서야 하는 거지. 내게 가장 큰 무력감을 선사했던 영역에서, 그래서 그 반대급부로 내 가슴을 심하게 뛰게했던 영역에서, 무력감을 떼어내고 가슴 뛰는 삶을 살아 보여야 하는 거지.

      그런데 랑랑, 과연 글이 의학보다 무력할까? 나는 갈수록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있어. 그래서, 나는 글을 쓸 거야. 지금은 쓸 거리도 없고 공부할 때이기도 하니까 못 쓰지만, 내가 삶의 다른 단계로 진입하고, 충분히 경험하고,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선물할 거리가 충분해지고 나면 꼭 글을 쓸 거야. 나는 이제 픽션은 다시는 꿈도 못 꿀 것 같아. (그건 좀 가슴이 아프기도 해.) 그렇지만 픽션보다 더 흥미롭고 감동적인 글을 쓸 거고, 그 글을 통해 진료실에서 한 명씩 만나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날 거야. 그거야 말로 아름다운 일이겠지. ♡

      이 글에 덧글 달아줘서 고마워 랑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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