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aus kommt heraus


* 어제 같이 유급당한 ㅅ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양의사 편입생인 ㅅ오빠는 서울에서 부원장 자리를 구해 일을 시작했단다.
오우, 의사 선생님~! 이제 내가 과외 10개를 해야 버는 돈을 다달이 받으시겠군요~ ㅋ

3월부터 6월까지 시골 서당에 들어가 있겠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실의에 빠져 도망치듯 떠나려는 것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니야. 지나고 보면 오히려 다행인 점도 많을 거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사회 경험을 좀 쌓거나, 그동안 하고싶었는데 못했던 거 좀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그래."
ㅋㅋ
아 그럼요 오빠.
그동안 하고 싶었는데 못했던 거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그래야죠.
사실은 예1 때부터 다 멈추고 한문공부 좀 본격적으로 한 후에 다시 공부하고 싶었거든요. ^^

* 여전히 속이 좀 쓰리고 가슴이 아프긴 하다.
뱀교수 월급으로 갖다버린 500만원도 아깝고,
지난 3년 동고동락한, 참 고맙고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동기들과 떨어져 가야 하는 것도 가슴아프고
이래 유급할 걸 모르고,
아무것도 못하고 맨날 맨앞 가운데자리에서 열심히 수업만 들었던 게 억울하기도 하지만,

나름, 즐기고 있다.
유급해서 학기 맞추느라 한 학기 휴학하게 된 상황을.
일본어 공부도 하고..
(유급 안 했으면 다음학기 준비에 이것저것 계획대로 공부하느라고 일본어 공부할 틈도 없었을 것.)
핑계김에 게으름 피우며 폐인질도 잠시 하고...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게으름과 폐인질을 즐길 명분을 세우고자 끊임없이 불행을 창조하기도 한다.)
전 같으면 내게 밥을 사는 건 상상도 안 했을 사람들에게 불쌍하게 보여 밥산다는 약속도 얻어내고
(아직 실제로 먹은 밥은 없다. 아, 있구나. 뱀교수님의 한우고기!!)
시골생활 구상도 하고
(기대 만빵. ^^)
멈춰 서서 나를 발견하는 작업도 계속 하고 있다.
(내가 상당히 부정적인 자아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발견했고, 많이 바꿔냈다.)

그래도 1월엔 조신모드였는데
2월엔 아주 본격적으로 한 판 놀아보려 한다.
아예 서울에 올라가 한 달 지내볼까, 까지 생각 중.
시골 들어가기 전에 실컷 놀아도 봐야지.
(왠지 시골쥐 서울쥐 이야기가 생각나는군. 근데 시골이라고 쥐 마음이 편했을까? ㅋ)
어차피 휴학할 거니까.ㅋㅋ
사실은 휴학도 1998년부터 꿈꾸던 것을 이제 처음으로 해보는 거다.
움화하. 나름, 꿈이 이루어진 것이라고나 할까. ㅋㅋ

3월 3일부터 들어가 있으려 했는데..
나는 실의에 빠져 떠나가는 패배자가 아니기 때문에
개강 첫 주엔 학교에 몇 번 나가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신입생들도 얼굴 이름이나 좀 알아두고,
뱀교수님에게 한우고기도 한 번 더 얻어먹고
3월 10일부터 들어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대신 나오는 주도 한 주 밀어야지.
6월 말일쯤 나올 듯.

* 나는 언어적 감각이 뛰어난 편이다.
잘난척이 아니라, 그게 내 적성인 게 어쩔 수 없이 티가 난다.
그런데 이번 유급의 근본원인은 나의 한자 능력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언어감각이 뛰어난 자가, 일종의 언어문제로 유급이라니.

한국 사람들은 한자, 한문이라고 하면 일반적인 다른 언어,문자와 아주 다른 감각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이놈의 것이 좀 특수한 문자언어이기는 하나
어쨌든 이것도 하나의 언어체계, 표기체계로 생각하면
많은 문제가 다르게 보인다.
나는 한자어, 또는 한문 문장의 형태론적, 통사론적 처리가 아주 잘 되는 편이다.
즉, 모르는 글자만 없으면 해석은 곧잘 하고,
글자를 안 보고 한글로 음만 쭉 적어놓은 걸 보고도, 어떤 뜻인지 잘 분석해 내는 편이다.
문제는 내가 글자 자체를 외우는 데 젬병이라는 거다.
남들보다 발달한 언어감각도 글자 못 외우는 데 한 몫 한다.
언어적인 처리가 잘 안 되면 매번 볼 때마다 글자 자체를 갖고 씨름할 텐데
그러질 않는 것이다.
(한자 쓰는 언어를 제외한 대개의 언어들은
발음할 줄 알면 표기를 외우는 데 큰 힘 들일 필요가 없고, 읽을 줄 알면 쓸 걱정도 별로 없다.)
기억력도, 나는 시각보다 청각자극에 대한 기억이 좀더 발달한 것 같다.
여튼 그래서, 무슨 뜻인지도 알고, 음도 알고,
그러니 내용을 뜻으로 풀어쓰라거나 한글로 쓰라면 잘 쓰는데
한자로 쓰라면 못 쓰는 것이다.
할 말은 없다.
한자로 쓰는 게 원칙인 동네에서 한글로 쓰고 불이익 당하면 사실 할 말 없는 것이다.
한의학을 한자로만 해야 된다는 원칙 자체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고
한국 한의학이 번역의 문제에 이렇게 무지했다간 머지않아 망한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
그게 억울하면 heraus 네가 교수 하라지.

남는 한 학기에 하필 서당에 들어가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그거다.
한자, 한문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나는 면허를 손에 넣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죽는다면 한의사로 살아보고 죽어야 후회 없겠다는 결론이 난 마당에!!
한자 한문 말고도 보충해야 할 것은 많고, 쉬면서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가장 시급한 것, 또한 제한된 시간에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란
한자/한문이다.
단순한 생활,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아침형 생활습관 또한 얻고 싶다.
공기 좋은 데서, 단순하게 생활하며, 많이 걷고, 경서 많이 읽고,
그러면서 좀더 정리된 인간, 평화로운 인간, 단순하고 명확한 인간이 되고 싶기도 하다.

* 어쨌든 즐겁다.

* 즐거운 Heraus Haus, 2월에 매우 성황리에 영업한답니다.
3월부터 4개월간 내부수리로 인해 휴업하오니
휴업하기 전에 즐거운 Heraus Haus를 방문하고 싶으신 분은
2월중 원하는 날짜에서 최소 3일 전에 전화예약하시기를 권장합니다.

* 부산에 다녀왔어요.
후배의 결혼식을 보았고
앞으로 학교를 같이 다니게 될 06학번들과 화려한 웨딩부페를 함께 했고
(앞으로 부산에서 하는 결혼식은 필사적으로 가겠어요!!!부산 웨딩부페 쵝오!)
07년의 마지막날, 8시간 진통 끝에 수술로 애를 낳은 친구와 하룻밤을 보내고
햇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해운대 바닷가의 암벽에 앉아 나를 들여다보고 왔지요.

* 바닷가 암벽 위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다 수첩에 적었어요.
결국 죽는다.
누구나 죽는다.
무엇을 해도 죽는다.
책임을 져도 죽고
책임지지 않아도 죽는다.
여행을 해도 죽고
책을 써도 죽는다.
다 죽는다. 누구나 죽는다.
결국은 죽는다.
엄마도 죽고
나도 죽고
**도 죽는다.
결국은 전부 다 죽는다.

* 여기까지 쓰고 나서
제어할 틈도 없이 무서운 속도로 튀어오른 문장은
어차피 죽는다면 독일에 살고 싶다, 였어요.
미쳤군. 그놈의 독일. 13년 묵은 나의 고질병.
그 강렬한 감정이라니.
할 수 없다. 이젠 정말 회피할 수 없겠다.
널 뿌리째 캐 버려야겠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 그러고 나서 생각했지요.
어디에 살든 직업은 필요하고
그건 한의사가 되어야겠다고.
독일에 살건 북극에 살건,
일단 면허를 따야겠다고.

* 계속해서 생각했지요.
결국은 죽는다는 절벽같은 진리 앞에서
만약에 어영부영하다가 지금 이대로 죽는다면
무엇을 후회할 것인가 하고.
뜻밖에도
거기에 대한 대답은
최근에 나를 사로잡던 것들이 아니었어요.

한의사로 살아보지 않으면,
침통을 챙겨 전쟁터나 난민캠프에 달려가 보지 않으면,
못 배우고 가난한, 너댓살이면 노동을 시작해 열댓살이면 아이를 낳고 다시 그 아이를 너댓살이면 노동하게 하는 그런 삶말고는 생각하지도 못하는 여자들과 그 허리춤에 매달린 아기들에게 달려가보지 않으면,
이란에 여행을 가서 스카프를 둘러쓰고, 스카프를 둘러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마주해 보지 않으면,

그러면 후회할 것 같다고 나는 적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내가 그렇게 열광해 마지 않는 아기를 낳아보지 않았다고 후회할 것 같진 않았어요.
작가나 예술가가 되지 않았다고,
대단한 비즈니스 우먼이 되지 않았다고,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보지 않았다고,
그렇다고 후회할 거라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내가 열광하거나 한탄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많은 일들이
사실은 죽을 때 후회할 만큼 내게 절실한 문제는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저, 부럽고 탐이 났을 뿐이었던 거죠.

* 죽으려고 죽음에 대한 메모를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나는 '죽어도' 자살은 하지 않을 인간이에요. (라고 나 스스로 생각합니다. ^^)
내 생각을 죽음이라는 절벽 앞으로 이끌고 갔던 건
부산 지하철 명륜동 역에서 본 글귀였습니다.

여우는 살구기름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여우를 잡기 위해 살구기름에 독을 섞어 여우의 길목에 놓는다. 그걸 아는 여우는 살구기름을 쳐다보지 않고 지나쳐간다. 그러나 그 냄새에 못 이겨 조금쯤이야 괜찮겠지 하고 살구기름을 먹는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여우는 살구기름을 벌써 반이나 먹었음을 알아차리고 자포자기하여 기름을 마저 먹는다. 여우는 기름병 곁을 한 발짝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는다.

묵은해가 끝나갈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유급이라는 사태를 맞았던 내가
새해가 시작될 때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병원에 누워있던 친구를 만나고 나와 읽은
어느 불교종단에서 포교를 위해 설치한 지하철역의 글귀..
그것이 나에게 그 하룻동안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내 삶의 살구기름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사로잡혀 한 발짝도 못 빠져나가고 죽어가는가.
그로부터 출발하여 확실한 결론, 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지요.

*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모두 가수가 되는 것은 아니고
운전을 좋아한다고 모두가 운전하는 직업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한의학을 좋아한다고 모두가 한의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경우에..
내가 오랫동안 한의학친화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생활해오긴 했지만
내가 한의학을 좋아하는 환자가 아닌 한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냥 당연하게 한 선택이 아니었어요.
인정하기 조금 짜증나지만 그건 그 당시 사귀던 남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나를 결박하여 입시학원에 집어넣은 것은 아니지만
뒤늦게 수능을 다시 보고 한의대에 온 것은
그 남자와 함께 살아보겠다는 것과 맞물린 선택이었어요.
그러다가 그 남자를 놓아버리고 나니 나는 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몸에는 신장결석이 생겼었고,
마음엔 극단적이고 어두운 것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들이 동시에 깃들었고,
늘 무엇인가에 대해 화가 나 있었습니다.
거의 1년 가까이 그랬던 것 같아요.
지난 봄 엘지챌린저를 지원한다고 정신없이 다니다 실패하고 나서야
내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인정하게 됐고
여름방학, 후배들에게 대학을 가르쳐주기 위해 대학을 샅샅이 읽고,
집단상담에 가서 여러 사람에게 '얻어맞은' 후에야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처음 유급사태를 맞이했을 땐, 왜 지금이야, 했습니다.
왜, 정신없던 그 때도 안 당하던 유급을 왜 지금, 왜 좀 열심히 해 보려니까 이제야...
하지만 내가 정말 정신없었던 그 두 학기에 유급이 났다면
난 학교를 떠나버렸을지 모르겠어요.
마음은 없고, 불같은 것들이 내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때니까...
지금 이 시기에 맞는 유급은.. 어쩔 수 없이 속은 쓰리지만.. 많은 것을 얻게 합니다.
유급을 맞지 않았다면 나는 토요일의 그 결혼식에 가지 않았겠고,
아직 병원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다가 입원실에서 하루를 묵지도 않았겠고,
동쪽을 바라보는 해운대의 절벽에 앉아 동에서 남으로 돌아가는 해를 받고 앉아
죽음을 바라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한의사가 될 '팔자'가 분명한 것 같습니다.

* 아마 봄이 되면 짐을 꾸려 서당에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3,4,5,6, 넉 달 정도를 산골에서 글읽고 산책하고 밥만 먹고 지내다 나올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 넉 달동안 이 블로그는 거의 휴면상태가 될 것 같습니다.
큰 이변이 없다면요..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Heraus’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com / Original WP theme by John Wrana / tattertools skin by yuno & NYA